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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딩과 시합하고 완패하다!

다음민우 2006. 6. 3. 20:14
뉴스: 초딩과 시합하고 완패하다!
출처: 오마이뉴스 2006.06.03 16:53
출처 : 생활정보
글쓴이 : 오마이뉴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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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초딩들이 말을 걸어오다

어제 저녁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2년 만에 시력을 쟀는데 시력이 0.7이상 떨어졌다는 걸 알았고, 한 달 만에 올라간 체중계 덕분에 몸무게가 2kg 이상 불었다는 걸 알았거든요. 내 몸이 왜 이러나, 하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먼지 낀 줄넘기를 찾아 들었지요. 줄넘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작정 나갔습니다. 가뿐하게 오늘은 천개만 하자, 하는 순진한 생각도 하면서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아파트 놀이터 근처에 자리를 잡았는데 좀 민망하더군요.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했지만 그놈의 건강이 뭔지 결국 폴짝폴짝 뛰었습니다. 그런데 놀랐습니다. 고작해야 한번에 10개였습니다. 아니, 내가 왜 이래! 하는 억울함이 들었지요.

낑낑대며 간신히 3백 개를 넘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놀이터에 있던 여자 아이 둘이 저를 향해 오더군요. 한눈에 봐도 초딩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줄넘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혹시 나한테 줄넘기 하는 법을 알려달라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아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사실 저는 초딩을 심각하게 피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유요? 몇 번 버릇없는 행동하는 걸 목격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서도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초등학생하면 으레 버릇없는 초딩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어서 지나가주기를 바라며 폴짝폴짝 뛰고 있는데 기어코 한명이 “줄넘기 잘해요?”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전 무시했습니다. 아파트 주민이라는 것보다 초딩이라는 생각이 앞선 탓이었지요. 아이들이 그냥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어처구니없게도! 아이들이 제 의사와 상관없이 삼각형 편대로 서더니 같이 뛰기 시작하는 겁니다. 황당하다는 말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었지요. 그때 제 심정, 정말 상상도 못할 겁니다.

초딩들에게 줄넘기를 배우다

아이들은 제자리에서 줄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앞으로 왔습니다. 위험했지요. 아이들과 말을 섞지 말아야지, 하던 저였지만 말려야했고 결국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넓게 서서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시합을 하잡니다.

시합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닙니다. 열 개 먼저 하기, 한발로 뛰기, 스무 개하고 제자리 앉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건 아니지만 상당히 민망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26살의 건장한 청년이 초등학생 두 명과 그것을 한다는 것을!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꾸할 여유도 없이 아이 중 한 명이 “시시시작!”을 외쳤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서 하게 됐지요. 처음에는 봐주려고 했습니다. 초딩과 시합해서 이긴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죽어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게 착각이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너무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초딩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발을 모아서 뛰세요.”, “빨리 돌리면 빨리 죽어요” 등등의 충고였지요.

시합은 계속 됐고 꼴찌는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새 등이 땀으로 흥건해졌습니다. 아이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자리에 셋이 앉았습니다. 그리고도 한참을 ‘줄넘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문득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못하는 걸요.

초딩의 이름을 듣고 감동하다

아이가 또 시합을 하자는 통에 얼마 쉬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생기발랄한 아이들이었지요. 아이들은 시합을 즉석에서 만들어냈습니다. 이번에는 한명씩 “누가누가 안 걸리고 오래 하나?”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한 명이 나서더니 시작하더군요. 42개를 하다가 걸렸습니다. 다음은 제 차례였지요. 최대한 분전했지만 39개에서 걸렸습니다. 그런데 숫자를 정리하다보니 이름을 알 필요가 있더군요.

“이름이 뭐니?”

“예린이요.”

듣는 순간 놀랐습니다. 수상쩍은 세월인지라, 특히 이 동네 아파트 단지에 강도가 많아서 낯선 사람 주의보가 뜬지라 이리 쉽게 말해줄 줄 몰랐던 거지요. 한편으로는 흐뭇했지요. 그냥 흐뭇했습니다. 그 기분에 다른 아이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갑자기 둘이 귓속말로 속닥거리는 겁니다. 그때서야 예상했던 그대로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기분이 묘하더군요. 그래서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말해주려고 했지만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알았을까요? 예린이가 왜 귓속말했는지 설명해줬습니다. 다른 아이 이름이 자기 엄마 이름하고 똑같다나요?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부르는데 그걸 알려줘야 할지, 아니면 진짜 이름을 알려줘야 할지 상담했답니다. 제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의 엄마 이름을 부르는 거니까 안 된다고 하면서요. 아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냥 ‘정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전 감동받았습니다. 네, 별 것 아니지만 그랬습니다. 착한 아이를 봐서일까요? 그 아이들은 그랬습니다. “내가요”라고 말하다가 곧바로 “제가요”라고 고쳐 말했거든요.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이 엉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어찌 버릇없는 ‘초딩’이겠습니까? 흐뭇할 수밖에요.

그도 아니면 이 아파트 단지에서,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들려준 ‘이웃’이 생겼다는 기쁨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흐뭇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더 줄넘기했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훨씬 큰 제 신발을 신고 뛰기도 하면서요. 우리 모두 아주 즐겁게 떠들고 웃었지요.

초딩, 아니 초등학생 이웃에게 넘어가다

날은 금방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승부를 했지요. 마지막까지도 제가 졌습니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한번은 1등해야지 했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경쟁이라서 그런가요? 아쉽더군요. 아니, 어쩌면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그랬을 겁니다. 그렇게 웃고 논 것에 그새 정이 들었나봅니다. 스스로도 놀랐지만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는 빈손이었다는 것이 속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음료수라도 사줬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언제 볼지 모르는 아이들이니 아쉬움은 더 컸지만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습니다. 아파트가 뭐 그렇지, 하는 생각에 우울해지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린이와 정이가 말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봐요”라고 말이지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 시간에 저는 약속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우습게도 그 순간, 약속을 어떻게 하면 미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네, 완전히 빠지고 말았지요. 초딩, 아니 초등학생 이웃들에게 반하고 만 것입니다.

어제는 제게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초딩이라는 단어 안 쓰기로 결심하고, 줄넘기도 배우고, 아파트에 초등학생 이웃도 생겼으니까요. 더욱이 건강해졌다는 걸 느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살 빼는 것도 좋고, 땀 흘리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닐는지요? 6월 2일, 건강해지는 날이었습니다. 아주 많이.

/정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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