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과학교육의 의미와 활성화 방안
경기과학교육원 강연(2005/12/14) - 이덕환(서강대, 화학과)
과학 교육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는다. 그러나 제7차 교육과정에서 이미 대폭 줄어들어 버린 과학 교과의 시수가 앞으로 주5일제가 시행되면 더욱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시대적 요구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과학 교육은 심하게 위축되고 있다. 학생들마저 과학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칫하면 부실한 과학 교육이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번영을 가로막는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과학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고, 과학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효율적인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본다.
1. 우리 사회에서의 과학과 기술
우리가 "과학기술입국"을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 벌써 반세기에 가깝다. 우리에게 전혀 낯선 현대 과학과 기술을 도입해서 극도의 빈곤을 물리치려던 노력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록 단순한 모방이기는 했지만 가발과 봉제로 시작된 우리의 기술은 곧바로 전자, 중화학, 철강, 자동차, 반도체 산업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조선과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룩된 과학 분야의 성장도 놀라웠다. 일제 강점기의 극심한 차별 때문에 우리 사회의 과학은 완전한 불모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원자력 분야에서 시작된 우리의 과학자 육성 노력은 오늘날 과잉 공급을 걱정해야 할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뜨거운 교육열이 놀라운 성과의 밑거름이 되었다. 비록 역사가 짧기는 하지만 이제는 순수 토종 박사 학위를 가진 우리 과학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단순히 과학자의 숫자만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일부 분야에서는 세계를 선도하는 과학적 업적이 이룩되고 있다.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황우석 박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현대 과학과 기술은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되어 왔던 심각한 환경 파괴, 위험한 방폐장 건설, 대규모 개발 사업 등이 모두 현대 과학과 기술의 어쩔 수 없는 결과로 인식되고 있다. 결국 현대 과학과 기술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가족 해체를 불러오는 치명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는 반(反)과학적 정서가 확산되어 버렸다.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도 심각한 생명 윤리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런 정서의 확산에 촉매 작용을 하고 있다.
2. 우리 과학 교육의 목표와 현실
제7차 과학 교과 교육과정은 "자연 현상과 사물에 대하여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과학의 지식 체계를 이해하며, 탐구 방법을 습득하여 올바른 자연관을 갖도록 한다"는 총괄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 총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지적, 탐구과정, 정의적, 과학 기술 사회적 측면에서의 세부 목표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의 '실용성'을 특히 강조하고, 학문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사회와 환경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과학적 소양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의 교육을 내세우고 있다. 과거 학문 중심의 과학 교육이 학생의 사회상, 개인적인 관심사, 실제적인 적용을 무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교육학적으로는 조금도 나무랄 곳이 없는 완벽한 목표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그런 목표가 우리 교육 현장에서 전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과학의 경제적 효용성과 실용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학생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사회적 요구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이 이끌어가야 할 미래 사회의 모습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학생들이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의미에서의 '성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 탓이다. 또한 창의성을 키워준다고 법석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 오래 되었지만 외국 대학원에 진학한 우리 학생들이 경험하는 가장 심각한 어려움이 바로 우리의 '창의성' 부족이다. 우리가 내세우고 있는 교육 목표는 물론이고 교육 방법이 학생들에게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럴듯한 포장보다는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3. 과학 교육의 진정한 의미
과학이 어렵고 딱딱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다. 사실 그림으로 가득 채워진 제7차 교육과정의 과학 교과서는 그런 주장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그런 교과서의 모형을 개발하는 작업도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언제나 쉽고 재미있는 것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서 정말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과목은 없다. 그런 과목은 학교에서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쉽고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애써 배우라고 강요받지 않아도 열심히 찾아서 배우게 된다. 모름지기 교육은 학생들이 어렵고 딱딱하다고 느껴서 멀리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판단은 기성 세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판단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 적응해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려면 상당한 높이의 진입 장벽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진정한 흥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작정 쉽고 재미있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그런 내용을 배워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어렵게 배운 내용이 자신의 미래에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배우는 과학의 진정한 의미와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쉽고 재미있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흥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결국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시켜 주지 못하면 아무리 쉬운 내용을 가르치려고 노력해도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사회적 유용성과 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해왔다. 자연의 신비를 밝혀낸 과학 지식을 알고 있으면 그런 지식을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더 재미있게 자연을 이해할 수 있고, 다양한 기술을 이용해야 하는 현대의 생활을 조금 더 유용하고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김치와 된장과 같은 전통 식품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과학의 가치는 경제적 효용성이다.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이 우리 사회의 생존을 결정하는 산업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주장이다. 최근에는 치열한 국제 경쟁 시대에 우리 사회를 지탱해줄 성장 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과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많이 듣는다.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사회적 유용성이나 경제적 효용성은 과학의 진정한 가치 중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인간의 존엄성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준 것이다. 인권과 자유와 민주라는 말은 모두 현대 과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개념들이다. 과학은 우리를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면서 민주적인 사회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민주화된 사회에서 과학적 상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할 수가 없다. 과학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않은 사회는 끊임없는 사회적 갈등으로 낭비만 계속해서 결국은 민주주의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리게 된다. 우리가 과학을 배워야 하는 진짜 이유다.
4. 과학 교육의 활성화 방안
우리 과학 교육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학생들 모두에게 전문 과학자에게나 필요한 소양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생활인으로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정교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필요는 없다. 지극히 초보적인 실험을 통해서 실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모든 학생들에게 가설 연적적 사고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과학을 정말 싫어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런 능력은 전문 과학자들 중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고도의 사고 능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결국 우리 학생들이 과학에 관심을 잃어버린 것은 전문가 양성에 필요한 소양을 무리하게 교육시키려고 노력했던 탓이다.
현대 과학은 일상적인 경험으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 과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화학 열역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엔트로피'가 바로 그런 예가 된다. 엔트로피를 이해하지 못하면 물이 왜 얼고, 얼음이 왜 녹는지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화학 교과 내용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화학 평형과 평형 상수의 정확한 이해도 불가능하다. 잘못된 엔트로피를 근거로 한 엉터리 교양 과학서의 결론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확산되어도 속절없이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다.
과학 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이해서는 평범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단편적인 개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에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과학 교육은 어차피 누구나 알게 될 쉽고 재미있는 내용을 지루하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만이 알 수 있는 추상적이고 어려운 개념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야만 성공할 수 있다. 즉 과학 교육에서의 창의성은 과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렵고 딱딱한 내용을 학생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5. 맺음말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이 민주 시민의 가장 중요한 소양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우리 사회를 지탱시켜줄 성장 동력을 개발하는 일은 과학자의 몫이다. 모든 학생들이 과학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을 배워야 하는 진정한 이유를 학생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노력을 해야만 배울 수 있는 차원 높은 과학 개념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이 과학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쉽고 재미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을 골라서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차원 높은 추상적인 과학 개념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것이 진정으로 과학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교사의 책임이다. 그런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확한 과학 지식과 창의적인 교육 방법이다.
이 글은 교육용으로 사용해도 좋으나 출처를
반드시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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